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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러와 브루크너.
그들은 모두 19세기 말 교향곡이라는 장르는 새로운 형태로 부흥시킨 위대한 심포니스트였지만, 사실 그 두 사람의 성격이나 음악은 매우 달랐다.
말러의 제자 브루노 발터는 말러와 브루크너의 차이에 대해 '브루크너는 이미 신을 찾았고, 말러는 끊임없이 신을 찾고 있다' 고 언급한 바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음악적 차이점을 잘 말해준다.
확실히 브루크너의 음악 속에서는 인간적인 고통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오르간 사운드를 연상 시키는 객관적인 음향, 집요하게 반복되는 악구. 그의 음악은 그저 초연하게 흘러갈 뿐이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신을 찾지 못한 말러의 음악에는 인간적인 고통과 기쁨의 드라마가 끊임 없이 펼쳐진다. 장송행진곡과 천상의 음악이 뒤섞여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음악. 그것이 말러의 바로 교향곡이다.
그런데 그 상반된 성격의 두 사람은 아주 좋은 친구 사이였다. 브루크너는 말러보다 36년 연상이 었지만 워낙 천진난만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보다 한참 어린 말러와 세대 차를 뛰 어넘는 우정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1877년 12월 16일, 브루크너가 교향곡 제3번을 초연했던 바로 그날이었다. 그날 브루크너는 쓰라린 패배감을 맛보아야 했다. 그의 교향곡 초연이 참담한 실패로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당시 브람스 편에 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한슬릭 일파들이 기라성같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바그너에게 헌정된 브루크너의 교향곡 3번의 초연이 순조롭게 진행될 리 없었다. 브루크너의 엉성한 지휘에 화가 난 오케스트라, 그리고 한슬릭 일파의 방해 공작으로 공연장에는 썰렁한 냉기가 감돌았다. 그나마 연주회에 참석했던 몇 안되는 청중들도 연주가 진 행되는 동안 하나 둘씩 자리를 뜨고, 간간이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연주가 끝날 무렵 객석에 는 10명 남짓한 브루크너의 추종자들만이 끝까지 남아 자리를 지켰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17세의 청년 구스타프 말러도 끼여 있었다.
비록 브루크너의 교향곡 3번의 초연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지만, 말러는 이 교향곡에 크게 감명 을 받아 이 곡을 네 손을 위한 피아노 곡으로 편곡하여 이듬해인 1878년에 출판했다. 브루크너 는 말러의 편곡에 아주 만족하여 그 답례로 말러에게 자신의 교향곡 3번의 총보를 선물했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 그들은 좋은 친구이자 동료가 되었으며 서로를 열렬히 숭배했다. 브루크너는 항상 자신 보다 한참 어린 말러에 대해서 항상 깊은 존경심을 나타내곤 했다. 그래서 말러가 그를 방문할 때마다 모자를 손에 든 채 계단을 뛰어 내려가 이 젊은이를 맞이할 정도였다. 그는 말러를 만날 때마다 그에게 자신의 작품을 연주해 보이며 이 신출내기 음악가에게 인정받기를 원했다. 후에 말러는 브루크너와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어느 상쾌한 아침, 대학 수업 시간 도중에 그는 나를 강당으로 불러냈다. 그는 먼지가 잔뜩 쌓인 둔탁한 피아노 앞에 앉아 훌륭한 아다지오 테마를 연주해주었다. 지금까지도 이것은 내게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 당시 그는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은 유쾌함과 젊음을 지니 고 있었으며 항상 진실했기 때문에 우리는 격의 없는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삶과 이상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술가와 인간으로서의 나 자신의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나는 나 자신을 그의 '제자'라 부르고 싶다. 또한 언제까지나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할 것이다."
그러나 말러가 실제로 브루크너의 제자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 문제는 말러의 전기 작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말러의 전기작가 슈라이버는, 말러가 비인 음악원에서 공부할 당시 그가 브루크너의 강의를 빠짐 없이 수강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슈테판은 말러가 브루 크너의 강의를 들었는지는 약간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또한 미첼은 말러의 편지를 예로 들어 말러가 실제로 브루크너의 제자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말러가 실제로 브루크너의 제자였든 아니든, 말러는 항상 브루크너를 그의 스승으로 생각하며 깊이 존경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후에 말러가 지휘자로서 활동하게 되었을 때 스스 로 브루크너 음악의 전도사임을 자청하며 당시에 잘 연주되지 않던 브루크너의 음악을 자주 연주했던 것을 보면, 브루크너에 대한 그의 존경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1891년, 말러가 함부르크의 오페라 극장에서 브루크너의 '테 데움'을 성공적으로 연주한 후 브루크너에게 써보낸 편지를 읽어보자.
"드디어 제가 당신의 작품을 연주하게 되었다는 편지를 쓰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어제 저는 당신의 놀랍고도 강렬한 음악, 테 데움을 지휘했습니다. 연주자들이나 청중들 모두 그 압도 적인 음악과 고귀한 정신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연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청중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은 채 깊은 감동에 전율하고 있었습니다. 지휘자와 연주자들이 자리를 뜨고 나서야 폭풍과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말러가 브루크너의 음악에 대해 항상 만족스러워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휘자로서의 말러는 브루크너의 음악을 세상에 전파하기에 힘썼지만, 작곡가로서의 말러는 브루크너의 음악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말러는 비엔나 필하모닉 연주회에 서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연주할 당시 자신의 취향대로 브루크너 교향곡의 상당 부분을 삭제 하고 연주하곤 했다.
1900년 1월 28일에 열린 제 6회 필하모닉 콘서트에서 말러가 브루크너 교향곡 4번의 2악장과 4악장의 몇 군데를 삭제하고 연주하자, 당시 비인의 브루크네리안들은 심한 반발을 하고 나섰다. 그들의 대표자 격인 테오도르 헬름은 '말러가 자기 멋대로 템포와 다이내믹을 고치고 악센트를 과장했으며 파렴치하게도 작품에 가위질을 해 시적이며 음악적인 이 작품을 조각조각 잘라버렸 다'고 비난했다. 항상 새로운 스캔들을 찾았던 비인의 음악계에서 말러의 '배은망덕'은 좋은 가십거리가 되었다. 졸지에 배은망덕한 음악가라는 낙인이 찍힌 말러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의 리허설에서 브루크너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나는 브루크너에게 반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그의 인품과 작품 모두를 열렬하게 숭배 하는 사람입니다...나는 나의 방식대로 브루크너를 기념하려 했고,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가능한 한 모든 존경심을 담아 이를 연주하여 영광스럽게 하려 한 것입니다."
문제는 말러가 '그의 방식대로' 브루크너를 존경했다는 점에 있었다. 그는 브루크너의 음악을 사랑했지만 브루크너 음악의 어떤 악구와 주제들은 자연스럽게 흐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말러가 보기에 브루크너의 음악은 어떤 면에서 논리적 구조가 결여된 '뒤죽박죽'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말러에게 고통을 주었고, 어떻게든 브루크너 음악의 '공허하고 부적절한 부분'을 삭제하고 연주하려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메스를 대지 않고서는 브루크너 음악을 연주할 수가 없어요. 원래 상태로는 브루크너를 절대 레퍼토리에 포함시킬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당시 평론가들은 말러의 이런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겨 그를 '브루크너의 제자인 체 하지만 브루크 너의 천재성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말러가 브루크너의 음악을 '그의 방식대로' 받아들였던 것은 브루크너의 천재성을 이해하지 못해서라기보다는 브루크너와는 전 혀 다른 삶의 태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말러와 브루크너. 그들은 서로를 존경하고 숭배했으면서도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완전히 다른 극단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그토록 존경 하고 숭배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열망하므로
-퍼온글-
참고로 말러는 브루크너 교향곡 6번을 초연했습니다.
요즘들어 말러와 브루크너붐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두 작곡가의 작품을 열렬히 연구되고 그리고 녹음되고 연주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매니아 층도 생겨났죠. 이들의 추종자들을 "말러리안" "브루크네리안"이라고 부릅니다.
세기말의 정서를 삶과 죽음이라는 고뇌로 표현한 말러, 엄숙하고 경건함속에 장중함을 추구했지만 누구보다 외로웠던 브루크너,, 저는 후세사람들을 고생시키는 이 두 작곡가들이 너무 얄밉습니다. 초보수준에는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공통점을 살펴보기로 하죠.. 교향곡을 본다면 흔히 알려진 9번까지 작곡을 했습니다. 그러나 말러는 미완성인 10번이 있고, 교향곡이라고 불러도 되는 대지의 노래가 있습니다. 브루크너는 9번이 미완성입니다. 3악장까지 완성이 되었는데, 4악장은 자신의 테데움으로 대체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습작교향곡이라고 부르는 0번과 00번(?)이 있습니다. 또 작품에 많은 수정을 한 작곡가입니다. 부르크너는 한 교향곡에 2번 이상을 자기 스스로 수정해서 그의 작품을 감상할 때에는 어디서 나온 버젼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출판사가 수정을 한 작품도 있죠.)
그들의 교향곡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기본이 1시간) 지휘자나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등은 가장 필요한 것이 체력과 집중력입니다. 말러 교향곡 6번 4악장이나 브루크너 교향곡 8번 3악장은 거의 30분정도 소요됩니다.
살아생전 그들의 작품이 온전한 평가를 받지 못한것도 공통점입니다. 특히 말러의 작품은 너무 시대를 앞서나간 탓이 크다고 봅니다. 둘다 천재작곡가이지만 말러는 뛰어난 지휘자로서 인정을 받았고, 부인과 자식까지 두었지만, 브루크너는 40넘은 나이에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교향곡 7번이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어서 그의 이름이 알려졌지만 그때에는 그는 너무 늙었습니다.
말러는 평생동안 삶과 죽음 문제에 집착했다면, 브루크너는 수도원에서 오르간 주자로 활약하면서 신에 대한 신앙생활에 온평생 다바쳐서 살았습니다. 아마 벨기에 출신의 프랑스 작곡가인 세자르 프랑크가 브루크너처럼 살았다고 봅니다.
그리고 대표작인 교향곡 이외에 말러는 가곡, 부르크너는 가톨릭 종교음악(미사,모테트,테데움)이 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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