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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이브에 브람스 교향곡 4번을 연습시키던 정씨는 "현악, 관악, 타악, 목관 소리가 계속 부딪친다"며 "좀 더 여유를 가지고 부드럽게 연주하라"고 주문했다. 그리고는 물결 타듯 몸을 움직이며 마치 이렇게 따라오라는 듯했다.
선율이 강해지는 순간에는 갑자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몰아치는 순간에 주저하지 말라"며 "어찌할 줄 몰라하지 말고 과감하게 가라"고 으르렁거렸다. 온 신경과 근육이 음악에 맞춰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 움직임이 너무 뜨겁고 간절해 정씨와 음악을 따로 분리시켜 놓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스스로 '음악의 시종(Servant)'을 자청하는 그는 올해 전 세계에서 100여 회 음악회를 지휘했다. 3~4일에 한 번꼴로 연주 무대에 선 셈이다.
성탄절과 연말연시도 음악에 붙잡혔다. 27일 예술의전당에서 서울시향의 브람스 시리즈 마지막 무대를 지휘하고, 29일 신세계백화점 본점에서 둘째 아들인 재즈 기타리스트 정선 씨와 약혼녀이자 재즈 보컬인 신예원 씨와 가족음악회를 연다. 자식 사랑이 끔찍한 그는 29일 직접 피아노를 연주할 예정이다. "가족을 위해 요리할 때 행복하다"고 말하는 정씨는 베네치아에서 사온 샐러드 재료인 루콜라, 아티초크 등으로 크리스마스 만찬을 차렸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연습실로 나와 서울시향에 대해 고민했다. 벌써 내년 1월이면 취임한 지 2년째. 올해 브람스 시리즈가 만족스러웠는지 묻자 "다들 잘 했다"고 답했다.
하지만 세계적 오케스트라로 가기 위해 채워야 할 것을 꼽으라고 하자 그는 갑갑한 표정을 지었다. 부족한 게 지나치게 많다는 게 그의 대답이다.
"유럽 교향악단이 수백 년에 걸쳐 이룬 것을 하루아침에 따라잡을 수 있나요. 한국 사람은 성정이 급한 게 탈이에요. 그리고 혼자서는 잘 하는데 힘을 모으는 팀워크가 부족합니다. 음악도 마찬가지고요. 모자란 것을 채워가면서 균형을 맞추면 되겠죠. 5년 안에 서울시향을 어느 정도 수준에 올려놓겠다고 장담했는데 이제 3년밖에 안 남았어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합니다. 내년에는 더 열심히 해야겠죠."
2년 전 그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서울시장 재임 시절 서울시향을 맡았다. 이 당선자가 전용 콘서트홀 건립 등 전폭적인 후원을 약속했기 때문에 예술감독 제안을 받아들였다. "훌륭한 오케스트라가 되려면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못지않은 우리집이 있어야 합니다. 2년 전 약속은 시장이 바뀌면서 차질이 생겼어요. 애초 노들섬 오페라하우스를 짓기로 했지만 무산됐지요. 교향악단은 꾸준히 지원하지 않으면 조금 가다 쓰러지고 말아요. 세계 정상 단체를 만드는 것은 '청계천 프로젝트'만큼이나 힘들죠. 저를 부른 사람이 이 당선자니까 도와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관악 파트를 보강하는 데 치중하고 있는 그는 내년에 말러의 교향곡 4번, 9번을 연주할 계획이다. 지난해에는 베토벤이었고 올해는 브람스였다.
"베토벤과 브람스처럼 말러 작품은 오케스트라 소리 훈련에 도움이 되요. 동양의 교향악단은 따뜻하면서도 굵고 힘 있는 소리를 내지 못해요. 서울시향도 일본의 오케스트라도 늘 그게 문제지요."
정씨는 북한에서 '찾아가는 음악회'를 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그런데 그와 서울시향보다 먼저 뉴욕필하모닉이 내년 2월 평양에서 연주하게 된다.
"누구라도 가는 게 안 가는 것보다는 좋죠. 하지만 슬픈 일이에요. 피를 나눈 형제보다 미국 사람들이 먼저 들어가 연주하다니요. 우리 목적은 이 음악이 아름답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리고, 도움을 주는 겁니다."
이날 인터뷰에는 그의 셋째 아들 정민 씨가 동행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지휘자의 길에 들어선 아들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지휘를 공부했다. 아들은 그냥 아버지가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스스로 배운다.아버지가 직접 깎은 지휘봉을 들고 전문 교향악단을 호령할 그날까지.
[전지현 기자]